Monday, July 7, 2008

첫 출근

logo

기나긴 폐인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첫 출근을 했어.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천천히 출근 준비를 했어.

 

먼저 광화문에 있는 본사에 9시까지 도착하고 계약을 한 뒤 바로 일하게 될 Client Site로 이동하게 되는 오전 스케줄. 잊어버린건 없는지 다시 한번 챙기고 가는 길에 커피도 하나 사 마셨어. 오늘은 정말 멋진 날이고 싶었거든.

 

아침부터 안개 비가 내리고 광화문까지 가는 길, 그리고 다시 충무로까지 가는 길이 막히는건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생각했지. 다만 계속해서 드는 생각은 과연 이곳이 나에게 자부심이라는 것을 안겨줄 것인가 라는 의문이었어.

 

벌써 눈만 너무 높아진걸까? 오랜 역사, 그러나 한국에서 알아주는 대표 컨설팅은 아닌 이 회사를 처음 본 느낌은 아쉽다는 생각이었어. 베인에서 보았던 그런 팬시함은 느껴지지 않았고 사이트는 아직 상장도 되지 않은 회사에서 1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좁은 사무실이었지.

 

원룸 형태의 사무실에서 15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면서 정신 없이 일하고 있었어. 삼성 계열사라는 이 회사는 그렇게 장래가 총망되어 보이지도 않은 그런 허름한 회사인 것만 같아 보였지.

 

맡게 된 일은 회사에 납품되는 자재를 구입해서 원하는 회사에 다시 파는 중간 유통업이야. 내가 담당한 부분은 공기 정화를 위해 수시로 갈아야 하는 필터를 구입해서 파는 것이지. 1년 매출이 50억도 안 되는 작은 부분이야. 마진은 5000만 원도 안 되는 수준이지.

 

물론 너무 많은 물품을 취급하기 때문이긴 하지만 첫 외국계 컨설팅에서의 인턴 기간 다루는 일인 것에 비해 실망스럽다는 느낌이 강해. 일하는 인턴들도 어떤 자부심 보다는 일에 찌든 느낌이 강하고.

 

하지만 컨설턴트들은 모두들 참 나이스한 사람들이야. 일은 많지만 즐겁게 일하고 있고 무엇보다 여기는 RA들을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어.

 

RA를 부를 때 꼭 이름 끝에 ~씨를 붙여주고 RA들이 서로를 부르거나 심지어 컨설턴트를 부를 때도 ~씨라고 불러. 존댓말은 물론이구. 네모에서 일할 때는 호칭이 형, 동생이었고 말도 험하게 했는데 외국계라 그런지 그런 면은 찾아보기 힘드네.

 

오늘 하루 종일 본래 내 모습에 60% 정도만 발휘된거 같아. 발휘라고 하기 민망하다. 그냥 60% 수준에서 버티기를 하다 온거 같아. 모두들 너무 바빠서 새로 온 사람에게 말 한번 걸어주기 힘든 지경인듯 싶었으니까. 여기에 잠은 왜그렇게 오는지. 지금까지 진행된 프로젝트 Follow up하라고 자료를 줘서 읽는데 잠들지 않으려고 몸 부림을 하도 치다가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챌 정도였으니까.

 

아직 출입카드도 나오지 않아 화장실만 가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빌려야 하고. 이래저래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내다 11시 쯤 먼저 가라는 말에 가장 먼저 빠져 나오게 된거야. 내일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더 나아지겠지.

 

이제 첫 대면을 했을 뿐이야. 사람들도 낯설고 즐거울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힘들고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이 보여 살짝 겁 먹었는지도 모르지.

 

오늘따라 희수가 서울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퇴근할 때 희수는 자고 있나봐. 연락도 안 되는구나. 스믹 여름 여행이랑 오늘 있었던 첫 출근 이야기들.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희수는 중국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우리 이야기는 쌓여만 가고 있는 것 같아.

 

모든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예상한, 계획한 대로 되어가고 있어. 희수는 중국에서 즐겁고 보람찬 시간을 잘 보내고 있고 난 너무 늦지 않게 인턴을 시작해서 이제 정신없이 바빠지려고 해. 막연히 생각했던 것처럼 희수와 함께 했던 약 100일 간의 시간이 우리가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던 것 같아.

 

하루 종일.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희수 생각이 많이 났어. 뚜렷하게 어떤 의식적인 관념이 아니라 그냥 희수에 대한 생각들이었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랑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 자유롭게 문자도 하고 전화도 걸고 싶다는 생각. 이렇게 내 인생은 정신없이 바빠만져 갈 것이 분명한 소용돌이를 바라보며 그래도 내 옆에는 희수가 있다는 안도를 느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할까?

 

그렇게 자고 싶던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주웠지만 원하는건 잠이 아닌 소통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아무 허물없이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어.

 

인생은 끝없이 돌고 도는 순환의 고리인가봐. 1년만에 이제 동아리에 대해서 별 고민 없이 이야기 해도 그것이 동아리 그 자체와 크게 벗어나지 않을만큼 익숙해졌다 생각하니까 다시 어색하고 초보인 위치로 돌아가 있구나. 낯선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인사하고 이름을 외우기 위해 몇번이고 중얼거리고. 좁은 책상과 손에 익지 않은 키보드, 불편한 의자. 잡히지 않은 기본 개념과 돌아가는 분위기. 겨우 몇일이면 다 해결될 일이지만 이런 기분을 진심으로 즐기며 살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게 돼.

 

희수가 이 글을 읽을 때 쯤이면 앞으로 2주는 지난 시간이겠지. 그 때 이 글과 다르게 일을 즐기고 사람들과 행복하게 일하고 있는 나였으면 좋겠다. 이런 글 첫 출근하고 썼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 아마 그렇게 될꺼라 믿고 잠에 들어야지. 내일은 다시 치열한 적응의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

 

사랑해. 희수야. 보고싶다.

0 Comments:

 
ForHS - Templates para novo blogger 2007